빛을 향한 건축 예술 순례

이 글은 곧 떠날 여행을 상상하며 쓰여졌습니다.
‘빛을 향한 건축 예술 순례’는,
유럽의 건축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그 안에 깃든 철학과 감각을 ‘살아보는’ 여행입니다.
예술적 경험을 추구하는 당신께, 이 순례를 권합니다.
첫째 날. 
“곧 니스 공항에 도착합니다.” 

기내 방송이 차분히 흘러나왔다. 여객기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매어 두었던 안전벨트 끈을 천천히 조였다. 창문 밖, 타원형 프레임 너머로 짙푸른 지중해가 시야를 채웠다. 한국의 바다와는 결이 다른, 깊고 투명한 파란빛. 그 위로 햇살을 머금은 물결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빛이 물 위에서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선탠오일의 달콤한 향, 향수와 화장품 냄새,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서양인의 체취가 뒤섞인 공기. 그것은 이국이라는 말의 냄새였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뎠다. 르 토로네 수도원을 비롯한 빛을 향한 건축과 예술을 경험하기 위해 찾은 남프랑스. 익숙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계절의 빛 속으로 들어섰다.


둘째 날. 
니스와 모나코 : 지중해의 빛과 선율
니스의 아침은 수채화처럼 번졌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를 걷는다. 바다는 푸르고, 파도는 조용히 해안을 쓰다듬는다. 신선한 빵 냄새가 골목을 따라 흘러나오고, 올리브와 라벤더 꿀이 수북이 쌓인 시장은 감각의 향연처럼 다가왔다. 남프랑스의 첫 아침은 온몸으로 맞이하는 축제였다. 
모나코로 향하는 길은 절벽과 바다 사이를 가로지른다. 고급스러운 도시 풍경,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원, 항구를 감싼 요트들. 우리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즐겼다. 송로버섯 리소토는 혀끝에서 가을의 흙내음을 품고 있었고, 와인 한 모금은 이 공간의 대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 르 코르뷔지에의 카바뇽, 그리고 에일린 그레이의 E1027. 절제된 선, 빛의 각도, 삶을 담기 위한 최소한의 건축. 이 작은 공간들은 크기와 무관하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인간의 삶을 감싸는 방식에 대해, 그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셋째 날.
벙쓰 : 마티스, 매그 재단 미술관 그리고 대자연

벙쓰는 계단처럼 쌓인 돌담과 붉은 기와지붕, 그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정원의 식물들로 가득한 예술가들의 언덕이다. 우리는 골목마다 숨겨진 풍경을 걷다가 마티스가 사랑한 풍경, 그리고 그의 영혼이 잠든 묘지를 찾았다. 조용한 성당 뒤편, 소박한 석비 아래 놓인 야생화는 이 도시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예술과 삶을 품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매그 재단 미술관은 이 언덕의 또 다른 성소였다. 마티스의 색채, 자코메티의 조각, 미로의 유희적 선들이 창밖 풍경과 겹쳐지며, 건축과 자연, 예술이 한 호흡처럼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한가로운 관람 끝에 마티스가 설계한 로사리오 채플을 찾았다. 새하얀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에 스며드는 햇살, 벽면을 가득 채운 푸른 선과 형상들은 기도처럼 조용히 우리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벙쓰의 언덕 위에서 예술과 빛, 침묵과 영성의 아름다운 균형을 배웠다.
그날 오후, 우리는 남프랑스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베르동 협곡을 따라 자동차를 몰았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깊게 파인 에메랄드빛 강줄기, 드문드문 나타나는 고요한 마을과 돌다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 바람이 창을 뚫고 들어오고, 절벽 위로는 독수리가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풍경은 너무도 광대하여 말로 옮길 수 없었고,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춘 채 그 모든 웅장함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드라이브는 여행의 경로이기 이전에 묵상의 시간이 되었다. 대자연의 침묵이 우리를 덮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작아졌지만 충만했다.


넷째 날.
자연과 영성 1 : 쎙뜨크화 호수와 르 토로네

르 토로네로 향하기 전 우리는 쎙뜨크화 호수에 들렀다. 고요한 수면 위로 아침 햇살이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호수는 짙은 청록색으로 잔잔했고, 주위의 산과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수면에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물가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물새 몇 마리가 수면을 스치듯 날아가고, 멀리서 들려오는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맑아지는 듯했고, 그 고요함은 마음속에 오래 남을 풍경이 되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깊게 파인 에메랄드빛 강줄기, 드문드문 나타나는 고요한 마을과 돌다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 바람이 창을 뚫고 들어오고, 절벽 위로는 독수리가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풍경은 너무도 광대하여 말로 옮길 수 없었고,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춘 채 그 모든 웅장함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드라이브는 여행의 경로이기 이전에 묵상의 시간이 되었다. 대자연의 침묵이 우리를 덮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작아졌지만 충만했다.
르 토로네 수도원에 도착한 오후, 햇살은 낮게 드리워져 돌의 표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고딕도 로마네스크도 아닌, 오직 침묵과 명상으로 지어진 이 수도원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 있는 건축물이었다. 우리는 작은 회랑 한쪽에 앉아 『그림자의 위로』를 펼쳤다. “빛이 드러내는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가 감추는 세계를 들여다보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마치 수도원의 벽들이 그 말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듯 고요히 울렸다. 문장과 공간이 서로를 반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 촬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수도원의 내부를 단 한 마디 말 없이, 오직 빛과 프레임을 통해 느끼는 시간이었다. 창을 따라 들어온 빛이 회랑의 벽을 타고 흐르고, 그림자가 기둥을 감쌀 때, 우리는 셔터를 누르기보다 숨을 고르며 그 찰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은 기록이 아니라 감각의 연장이었다.


다섯째 날.
예술과 영성 2 :  프로방스의 들판과 실바칸, 세낭크

프로방스의 고요한 골짜기에 위치한 실바칸 수도원은 침묵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돌로 된 구조물 사이로 떨어지는 빛 한 줄기가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다. 벽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큰 소리로 삶의 본질을 묻는다. 한기가 감도는 석조 회랑을 천천히 걸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 고요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 『그림자의 위로』를 펼쳤다. 어두운 회랑에 내려앉는 빛과 그림자의 리듬은, 책 속 문장들과 기묘하게 겹쳐졌다. 건축과 사유, 영성과 감각이 하나의 선율처럼 울려 퍼지는 공간이었다.
세낭크 수도원에선 빛이 기도였다.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수도사들이 앉는 자리 위로 머물며 고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공기는 성스러워졌고, 단단한 돌의 표면조차 따뜻하게 느껴졌다. 라벤더가 사라진 들판은 공허했지만, 그 빈 공간은 우리 내면을 투영해주는 거울이 되었다.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의 장소였다.
빛은 하나의 언어가 되어 우리에게 닿았다. 건축은 형태가 아니라 기도였고, 침묵은 곧 명상이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오래 머물렀다. 걷고, 앉고, 숨을 고르고, 다시 바라보았다. 어느 하나 과하지 않은 절제의 미학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건축이 어떻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지를 체감했다. 롱샹은 그저 하나의 종교 공간이 아닌, 빛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감각이 만나는 시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순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건축과 예술, 영성과 삶이 만나는 진정한 경계. 그 빛은 우리 마음속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여행의 모든 순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말이 되었다.


여섯째 날.
마르세유 : 도시의 속도와 르 코르뷔지에의 감각
마르세유는 다르다. 남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이 느긋한 시골의 풍경이라면, 이곳은 속도와 열기의 도시였다. 오래된 골목들과 복잡한 교차로, 항구의 냄새와 시장의 활기. 도시의 결은 거칠고 빠르며,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그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르세유의 얼굴을 따라가며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 미래의 조형물처럼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우뚝 서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실험적인 주거 건축. 복도 하나, 창 하나, 계단 한 줄기마다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내부 복도는 거주자의 삶을 유연하게 연결하고, 채광은 기능을 넘어 감정을 조율했다. 옥상 정원은 하늘과 도시, 인간과 건축이 수직으로 맞닿는 장소였다. 건축이 하나의 철학이자 시대를 위한 해답이었던 시절, 코르뷔지에는 삶을 설계하는 작업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조용히 계단을 오르며, 이 도시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새롭게 쌓아올렸다. 마르세유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건축의 캔버스였다. 그날 저녁,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현지인 추천 식당으로 향했다. 해산물이 싱싱하게 놓인 시장에서 바로 건너온 듯한 접시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그 안에는 마르세유의 바다, 바람, 노동, 역사, 그리고 일상의 맛이 담겨 있었다. 식당 안은 시끌벅적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여행 중 가장 깊은 정적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도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일곱째 날.
아를 : 예술과 시간의 공존
아를에 들어서는 순간, 색이 달라졌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 본 강물, 카페, 노란빛 벽. 그림이 아니라 기억처럼, 풍경은 조용히 우리 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그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병원 정원, 해바라기 들판,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의 강둑. 고흐가 보았던 빛과 그림자, 그가 앓고 그렸던 풍경이 오늘의 햇살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미술 체험 워크숍에 참여했다. 고흐의 시선으로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노란색을 더 진하게, 붓끝을 거칠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 시대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물감 냄새와 햇빛, 그림자, 붓질이 뒤섞이는 그 순간, 우리는 그와 나란히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우리는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지역 식당으로 향했다. 라 로케뜨(La Roquette) 지역 골목 깊숙이 자리한 이 식당은 외관은 소박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특별함이 감돌았다. 지역의 제철 식재료로 구성된 메뉴는 남프랑스의 풍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주인 부부는 우리가 먼 곳에서 온 여행자임을 알아차리자 따뜻한 미소와 함께 집에서 만든 샤르퀴트리와 와인을 먼저 권했다. 식사 내내 세심하게 맞춰주는 서비스, 담백한 설명, 그리고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서의 여유. 우리는 단순히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 환대받았다는 기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식사 후, 아레나 인근의 구도심을 다시 걸었다. 작은 갤러리와 공방, 골목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 창문 아래 놓인 화분들까지. 마치 천천히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그 골목마다 스며 있는 듯했다. 라 로케뜨의 오후 햇살은 벽을 따라 흘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모두 어떤 느린 춤처럼 보였다. 도시가 말없이 내어주는 그 고요와 여유는, 여정 후반의 리듬에 가장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여덟째 날.
엑상 프로방스 : 고유의 리듬
엑상프로방스. 물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분수가 흐르고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이 도시에서는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른다. 생소베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Sauveur d’Aix-en-Provence)은 고대 로마 시대의 흔적부터 고딕과 바로크 양식까지 시간의 층위를 간직한 건축물이었다. 두꺼운 기둥들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은 오랜 신앙의 결을 담고 있었고, 예배당의 침묵은 도시의 복잡한 리듬과는 전혀 다른 시간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성당 안에서 오래 머물렀고, 천천히 눈을 감고 빛의 움직임을 귀로 느꼈다.
성당을 나와 구시가지(Centre Ville)를 걸었다. 프랑스의 일상이 흘러가는 골목, 그 안에는 예술이 삶의 일부로 녹아 있었다. 거리 악사가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 소리, 벽에 그려진 포스터와 손글씨 간판, 문득 열린 창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예술은 박물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발걸음 위에도 있었다.
우리는 어느 조용한 광장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노천카페의 찻잔에서 피어나는 향, 창가의 베란다에서 흔들리는 커튼, 아이들이 분수대 주변을 뛰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 같았다. 이 도시에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감성이 있었다. 프랑스의 문화란 이런 곳에서 온전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단단히 쌓아올린 석조 도시 한가운데서, 우리는 여덟 밤의 여정을 천천히 접었다.
빛, 공간, 시간, 향기, 감정. 그것들이 한데 모여 순례의 마지막을 빛으로 마무리했다.
남프랑스에서의 일곱 밤. 그 풍경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니스의 해변, 모나코의 테라스, 수도원의 돌벽, 마르세유의 옥상, 아를의 그림자. 이 모든 순간은, 우리 안에 조용히 쌓여 하나의 지층이 되었다.
여행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퇴적된 시간처럼 남아 삶의 어딘가를 바꿔놓는다. 예술과 건축, 미식과 자연, 그리고 문화. 그것들이 어우러진 이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사유의 여정이었다. 남프랑스의 가을이 그렇게 우리를 지나갔다.

2025년 10월 27일